15세에 엄마가 된 나, 용서해 주렴



1977
년 열 다섯.
딸이 귀하던 우리 집안의 막내였던 난

공주님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중, 교육자이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
대학생 오빠에게 과외를 받았다
.

따뜻한 눈빛을 가진 그에게 나는 반해 버렸고

그 역시 나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
그렇게 서로 가까워졌고 나는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

그때 쯤, 그에게 영장이 나왔고

그가 입대한 후, 나는 배부른 모습으로

그의 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이 임신을 하고
,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날

시댁에선 좋게 받아줄 리가 없었다.
만삭이 되고 나서도 가족들의 빨래며 청소
,
집안일을 해야 했고
,
시할머니의 중풍병 수발도 감당해 내야했다
.

어느 날, 낚시터에 계신 시아버지의

새참을 가지고 나가던 중 진통이 왔고
,
나는 쓸쓸히 그와 나의 사랑의 결정체인

혁이를 맞이하였다
.

시간이 흘러 그가 제대를 했지만

그는 멀리서 공부를 했고,
나는 시할머니의 병 수발로

혼자 남아 시집살이를 했다
.

그러던 중, 아버지의 환갑잔치 때문에

부산에 가게 됐고, 그의 자취방에도 들렀다.
그런데, 그가 자취하던 곳엔

말끔하게 정리된 여자의 소품들이 가지런히 있었다
.
놀란 가슴을 끌어안고

학교로 가서 그를 정신없이 찾아다녔다
.

멀리서 그를 보게 되었고

그의 옆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짓을 했고
,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그와 그 여자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

한참 후 그는 "나의 첫 사랑이야

유학생활하면서 힘들어 할 때
,
옆에서 보살펴 준 고마운 여자야
.
하지만 난 이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

나는 그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이였다
.
너무 큰 충격에..너무 뻔뻔한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목이 메여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고
.
명치만 무겁게 눌릴 뿐이었다
.

그리고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
무엇보다 그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니까
.

나와 우리의 아이를 포기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사랑이라는 거짓의 탈을 쓴 그의 곁을 떠날 때

이미 둘째를 임신한 몸이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운이를 눈물로 맞이했다.

나는 다시 가족을 찾았다
.
큰 오빠는 혁이와, 운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내 능력이 없었기에

자식을 조카로 만나야했다
.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
나의 큰아들 혁이가 오늘 결혼을 한다
.

그리고 오늘 혁이가..메세지를 남겼다
.
"
고모..! 내일 결혼식장에 예쁘게 해서 오세요
.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
지금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저 기억하고 있어요
.
사랑해요. 엄마. 이젠 좋은 사람 만나세요
.
아빠 아닌 그분 같은 사람 만나지 말구요
.
엄마를 아끼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세요..제발
.."

뜨거운 눈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 내렸고

그에게서 버림받던 그날처럼
명치가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

사랑이라는 죄악으로 내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 채 빼앗아 가버린 그 사람
.
20
여 년간 내 인생을 눈물로 채우게 했던

원망과 증오의 가슴으로 살게 했던 그가.
오늘처럼 그리운 날은 없을 것이다
.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
자신의 핏줄이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오늘

불과 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본 그를
아빠로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실을
..,

모습조차 보지 못한 또 하나의 핏줄이

보름만 지나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하는 이 사실을
.

지혁아, 제발, 한 여자만을 평생 사랑하길
....
지운아..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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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자*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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