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의 부활.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빛을 보게 된 죽력고는 그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술이다. 한 명의 장인에 의해 ‘몇 병씩’만 만들어지는 탓에 술 맛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흔치 않다. 다행히 3년 전부터 순전히 주문에 의해 제조되면서 역사속에 묻혀버릴 뻔한 죽력고가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시중 음식점 등에는 시판되지 않는다. 관심과 노력을 수반한 애주가들만이 조선 3대 명주의 묵직한 맛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마셨다는 술

죽력고는 조선시대에 출간된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등에 나온다. ‘조선상식 문답’에서 최남선은 평양 감홍로(甘紅露), 전주 이강고(梨薑膏)와 함께 죽력고(竹瀝膏)를 우리나라 3대 명주로 꼽았다. 특히 매천 황현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전봉준이 전북 순창 쌍치에서 일본군에 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서울로 압송될 때 죽력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이 있다.

죽력은 대나무 토막을 항아리에 넣고 3일간 불을 지폈을 때 흘러내리는 대나무 즙이다. 한방에서는 중풍·해열·천식 등의 치료에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죽력고는 죽력에 솔잎·생강·창포 등을 넣고 소주를 내리는 방법으로 증류시켜 만든 것이다. 세 번을 내리기 때문에 주조에 3주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는 22도와 32도 두 종류가 있다.

#3년 전부터 맥 이어져

대표 명주 반열에 올라 있는 죽력고가 생소하기만 했던 것은 죽력이 식품이 아닌 약재로 식약청에 등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죽력고의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은 3년 전이다.

전통술 담그기 무형문화재인 송명섭씨(49)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였다. 송씨는 가업으로 전수돼 오던 죽력고를 살려내기 위해 서울 중앙도서관 등을 뻔질나게 오가며 각종 문헌을 죄다 복사해 번역했다. 결국 죽력을 이용해서도 전통주를 담글 수 있다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받아냈다. 그 시간만 10여년이 걸렸다.

죽력고에 대한 기억은 송씨의 외증조부인 은재송씨(1864~1945)로부터 시작된다. 태인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던 은씨는 전봉준 장군보다 아홉살 아래였다. 은씨는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직접 술을 빚어 치료 보조제로 사용했다. 개를 고아 만드는 무술주와 연엽주·호마주·복분자주 등은 당시부터 죽력고와 함께 약술로 활용됐던 셈이다.

죽력고 제조기법을 전수받은 것은 송씨의 어머니 은계정씨(1917~1988)였다. 갖은 약재를 가지고 송씨 가문에 시집 온 은씨는 태인양조장을 경영하던 남편과 함께 전통주에 대해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 남편 송씨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치료약으로 죽력고를 내려 마시게 해 완치시켰다. 가업으로 내려온 죽력고 제조기법에 관한 기록은 없다.

현재 태인양조장 주인이 된 송씨 역시 어머니 곁에서 술빚는 것을 도우며 몸으로 체득했다. 죽력고는 제조 방법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하지만 약 같은 술로서 효험은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죽력고 제조가 허용된 2002년 12월 ‘아름다운 술을 찾습니다’라는 전통주 공모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궁합이 맞는 안주로는 삼합이 꼽힌다. (063)534-4018

 

 

 

[전통주 기행]우리 조상들의 비방이 담겼죠


중국을 다녀오던 길, 연안부두에서였다. 인천 세관을 지나오면서 큼지막한 유리병에 담긴 술을 보았다. 팔뚝만한 황기가 담긴 황기술이었다. 바로 옆, 우승트로피라도 담겼을 법한 붉은 상자에는 금빛 글씨로 삼룡주(蔘龍酒)라 쓰여 있었다. 그 안에는 팔뚝만한 더덕이 들어있다고 했다. 둘다 도수 높은 중국 고량주에 약재를 담은 침출주다.

참 궁금하다. 우리네만 그럴까? 몸에 좋다는 식품이나 약이나 술을 우리네만 유난히 밝히는 것일까? 이 분야에 있어 우리가 심하다는 심증은 간다. 우리는 약효를 알 수 없는 물도 약수라 부른다. 주세법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약주(藥酒)라는 항목이 따로 있다. 약주에는 누룩을 사용해서 빚은 전통 민속주가 포함되어 있다. 약술을 밝히다보니 북한이나 중국에서 유입되는 술들도 우리 취향에 맞춘 약술들 일색이다. 마치 중국이나 북한사람들이 약술만 먹는 게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그런데 약술이 귀하다고, 꼭 먼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비방 속에도 잘 담겨 있다. 전통 약주는 물론이고, 뜻 그대로 약성(藥性)이 있는 술들을 죄다 포함하여 나라 안에서 가장 돋보이는 약술 중의 하나가 죽력고일 것이다. 죽력은 한방에서 사용되는 값비싼 약재다. 제대로 내린 죽력은 1리터에 40만원 안팎 한다. 맛이 강렬하고 진해서, 많이 먹을 수 없어 옛 사람들은 술에 실어 마셨다. 심장병이나 협심증 같은 성인병에 좋고, 중풍에도 좋고, 타박상을 입어 어혈이 생겼을 때도 썼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될 때, 이 술을 찾았던 이유도 바로 치료를 위해서였다.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죽력고를 마시면, 묵직한 죽력향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그 어떤 술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한 향과 굳센 맛이다. 그래서 나는 죽력고를 마실 때마다, 술과 약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무거운 액체라는 느낌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허시명|전통술 품평가·여행작가〉

 

 

[전통주 기행]‘100년만의 부활’에 가슴 뿌듯


죽력고를 만드는 명인을 만나러 태인으로 가던 날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전북 태인은 일제시대 호남선 철로가 읍내를 관통하게 되자 유림들이 철마를 거부해 신태인이라는 마을이 생길 정도로 기개있는 지역이다. 지금도 거리엔 인적이 뜸하다.

태인양조장을 찾기 위해 두어 바퀴를 돌았다. 양조장 역시 세태를 거스를 수 없었나. 한때 지역상권의 중심이었을 이곳은 올망졸망한 장독만 빼곡했고 흔해빠진 간판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무형문화재 송명섭씨는 대대로 지켜온 양조장 안채에서 기자를 맞았다. 근근하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죽력고의 재탄생을 위해 심신을 바친 그의 첫 마디는 “힘들었다”였다.

“옛 노랫가락에 양반가 몰락을 비유한 게 있어요. ‘죽력고 어데가고 모주 한잔 없더라’라는 내용이죠. 그만큼 상류사회에서 흔한 게 죽력고라는 술이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죽력이 약재라는 이유로 술을 빚을 수 없게 된 거죠. 이 사슬을 풀기 위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 횟수는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죽력고를 제조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진 날. 그는 부인과 함께 울었다. 어머니와 조상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있게 됐다는 격정이 치솟은 것이지만 자칫 세월속에 묻힐 뻔한 명주 죽력고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지금은 죽력고 소문을 듣고 주문하시는 분께만 드릴 수 있습니다. 20여일은 기다려야 해요. 전통방식의 소주고리를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전적으로 수작업에 의존해야 합니다.”

송씨는 스스로 소주고리에 손을 대기 전까지 죽력고가 이렇게 탁월한 술인지 몰랐다고 한다. 간해독 능력이 뛰어난 데다 당뇨와 혈압에도 좋다는 것이다. 그는 죽력고를 마신 뒤 숙취해소능력에 대해 “한마디로 사우나를 하고 온 기분”이라고 잘라말했다.

“농림부 장관상 하나만 받았어도 정부 정책자금을 받는 데 어려움이 없겠건만 은행을 찾았더니 재산이 없어 자금을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무형문화재면 뭐 하겠어요.”

송씨는 낡은 양조시설을 바꿔보고 싶어도 전통주 제조에 관한 배려가 없는 현실이 아쉽다고 말한다.

〈태인|박용근기자 yk21@kyunghyang.com